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멸망 이후 == [[로마 제국]]의 서방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서유럽 전역에는 크나큰 정치적, 문화적 혼란이 발생했다. 당시 브리타니아(영국)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 인구가 감소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이건 초기 중세인들이 특별히 무식해서 그런 건 아니다. 게르만 정치인들 역시 그리스-로마 문명을 애호했고, 로마인 인텔리들을 포섭했다. 도시 인구의 감소는 거대 제국의 붕괴와 정치적 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도시 쇠퇴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인 브리타니아(영국)는 애초부터 로마 제국의 변방으로 도시화율이 다른 지역보다 낮은 지역이었다. 브리타니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군사도시 아니면 속주 행정과 관련된 곳이었으니, 제국이 붕괴하면 같이 쇠퇴하는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피해가 워낙 막대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세력들의 충돌이 완화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체계를 이룬 1~2세기 정도 지난 다음에서야 회복세를 이룰 정도였다.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에도 잔존세력들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수아송 왕국]]'''(Regnum Syagrii)은 서로마 제국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로, 최후의 갈리아 총독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통치했고, 그의 아들이었던 시아그리우스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자리를 계승했다. 하지만 486년 [[프랑크족]]의 남하로 시작된 전쟁에서 패배한 수아송 왕국은 멸망했고 시아그리우스는 이듬해에 처형당했다. 다른 로마계 왕국들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중앙 정부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예로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기지들이 있었다. 물론 서로마 정부는 소멸해 무방비로 노출되었지만 반달족 주변의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서로마|옛 고토]]를 [[유스티니아누스 1세|수]][[벨리사리우스|복]]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오도아케르]]는 17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와 달마티아를 지배하다가 이후 493년, [[동로마]] 황제인 [[제노]]의 명령을 받고 이탈리아를 침공한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에게 살해당했고 [[동고트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탈리아 본토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하에서 서로마 제국의 행정체계와 문화를 유지하며 한동안 평화롭게 존속했으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해 동고트, 동로마, 랑고바르드로 주인이 계속 바뀌던 6세기 중·후반부에 고대 로마적인 이탈리아는 결국 종말을 맞고 말았다.[* 학계에서도 이 시기에 고대 이탈리아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서적이 있다. (《[[https://www.amazon.com/Imperial-Tragedy-Constantines-Destruction-363-568/dp/1781256322|Imperial Tragedy: From Constantine’s Empire '''to the Destruction of Roman Italy''' AD 363-'''568''']]》) 그리고 프랑스 사학자인 Bertrand Lançon 또한 저서 《[[https://www.amazon.com/Rome-Late-Antiquity-Ad-313-604/dp/0748612408|Rome in Late Antiquity: AD 313-604]]》에서 이 고트 전쟁 시기가 로마 시에 있어서 고대 후기 중 가장 암흑기였다고 했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5세기 초와 6세기에 서방의 다른 도시들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았다.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심리적으로는 중대한 충격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심각한 파괴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455년 반달족의 공격조차 그렇게 심각한 참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재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심지어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대도시들 대부분은 초토화되고 인구가 격감했다. >---- >-《하이켈하임 로마사》(김덕수 번역) 981쪽 [[조지타운 대학교]]의 고전주의자 교수인 제임스 J. 오도넬의 견해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로 제국 서방에 대한 지배력은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더 야만적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오도넬은 서방이 북쪽과 동쪽의 야만적인 이웃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로마의 집정관들 대부분은 "제국"의 명목상의 경계 밖에서 태어났다. 제국의 시민들과 그들의 표면상 야만적인 이웃들은 그 수로들을 가로질러 많은 교류를 했다. 제국과 가까운 부족들은 제국 내 사람들의 많은 관습, 복장, 제도, 습관을 받아들였다. 오도넬은 제국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과 부족들의 이동을 약간 혼란스럽지만 대부분의 서양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보다 더 평화로운 것으로 묘사한다. 그는 훈족의 왕 [[아틸라]]를 서양 역사상 가장 과대평가된 악당으로 평가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훈족들은 전투에서 격퇴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호 인정된 우월한 문화에 동화된 것이었다. 로마는 455년에 반달족에 의해 약탈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재편되었다. [[오도아케르]]는 서부 제국의 지도자가 되어 황제가 아닌 "왕"의 칭호를 맡았지만, 476년부터 493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아 현명한 지도력과 안정을 제공했다. 493년부터 526년까지 그의 영역을 이어받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로마 제국의 법적인 행정과 학문적인 문화를 지지했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주요 건축 계획을 추진했다. 505년에 그는 발칸 반도로 확장했고, 511년에 [[부르고뉴]]와 [[반달 왕국]]에 대한 패권을 확립했다. 따라서 오도넬은 서로마가 5세기 중반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26년까지는 고트족과 훈족의 후손들에 의해 잘 통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국을 통일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을 정복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군대를 출발시켰으나 그들이 한 짓이라고는 제국의 서부를 망치고, 서쪽의 로마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동부의 제국에서 이탈시킨 것 뿐이었다.[[https://legallegacy.wordpress.com/2023/01/20/review-of-the-ruin-of-the-roman-empire-a-new-history-by-james-j-odonnell/|#]] 따라서 오도넬은 동고트 왕국 시기까지 서로마의 게르만족은 사실상 로마인이나 다름 없었고 오히려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에 인해 유지되고 있었던 서로마의 잔재를 붕괴시킨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이 이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단적으로 포카스의 재위 기간인 6세기 말~ 7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기에 로마시의 [[원로원]]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는 로마적 전통을 규정할 수 있는 로마적 엘리트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사실상 붕괴했음을 뜻한다. 동로마 제국의 이런 만행으로 인해 이때쯤 가면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해당 단어를 사용한 로마 시 주민들과 일부 동로마령 이탈리아인들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마 제국의 남은 잔재까지 붕괴하고 동로마 제국의 환관 나르세스가 옛 이탈리아 본토를 일개 속주마냥 취급하며 쥐어짜자 이탈리아의 라틴 로마인들이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은 >'''"차라리 [[그리스인]][* 이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 고 했을 정도였다.[*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 훗날 [[동서대분열]]과 [[4차 십자군]]으로 파국을 맞는 이탈리아 라틴인들과 동로마 그리스인의 반목이 시작된 것이다. 훗날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월계관을 받으면서 서로마 제국의 후계를 잇는다고 공언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된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80년 뒤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서로마 제국의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이탈리아 전역과 북아프리카, [[안달루시아]]를 수복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장기간의 전쟁과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제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나머지 서방 영토를 수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수복한 이탈리아는 불과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으로 걸레짝이 되었고, 나중에 [[이슬람 제국]]이 흥기하면서 북아프리카를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레반트, 시리아 등 동방 영토 상당수도 잃고 말았다. 한편 언어에 있어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기 쯤에 식자층의 그리스어 지식이 빠르게 쇠퇴하고, 라틴어가 학술어에서 단독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